크래미는 게가 아니야 — 명태 한 마리가 게맛살·어묵·피시볼이 되기까지
있잖아, 얼마 전에 오십보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올라왔어. 냉장고 속 크래미 한 봉지가 주가를 움직였다는 이야기. 돈쭐 운동이 소비와 투자를 동시에 움직이면서 '크래미'라는 브랜드가 순식간에 뉴스의 중심이 됐거든. (자세한 이야기는 → 크래미 한 봉지가 주가를 움직였다)

그런데 그 소동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크래미, 그거 진짜 게야? 어묵은 뭐로 만들어? 오뎅이랑 어묵이랑 달라? 피시볼은 또 뭐야?" 하나씩 풀어보면 전부 연결돼 있어. 그리고 그 연결의 중심에 옆나라 일본의 **수리미(すり身, Surimi)**라는 오래된 기술이 있어. 오늘은 그 이야기야. 🐟
🧪 수리미란 무엇인가 — 생선을 '백지'로 만드는 기술
수리미는 한자로 '擂り身', 뜻은 '갈아낸 살'이야. 생선살을 곱게 갈고, 물로 씻어 불순물과 잡냄새를 제거하고, 수분을 짜내서 순수한 생선 단백질 덩어리만 남기는 과정이야.

이렇게 만들어진 수리미는 그 자체로는 아무 맛도, 냄새도 거의 없어. 그냥 흰색의 쫀득한 단백질 덩어리야. 그런데 이게 포인트야.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어. 게맛을 내면 크래미가 되고, 어묵 모양으로 만들면 어묵이 되고, 동그랗게 빚으면 피시볼이 돼.
수리미를 만드는 과학은 생선 근육 단백질(미오신, 액틴)의 성질을 이용해. 생선살을 곱게 갈면 단백질이 겔(gel) 형태로 변하는데, 이걸 가열하면 단단하고 탄력 있는 구조로 굳어. 이 겔화(gelation) 현상이 어묵·게맛살 특유의 쫀득한 식감을 만드는 거야.
🏯 헤이안 시대부터 시작된 이야기
수리미의 역사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년)로 거슬러 올라가. 1115년경 일본 궁중 연회 기록인 《유취잡요초(類聚雑要抄)》에 생선 페이스트를 대나무 꼬챙이에 감아 구운 음식이 등장해. 이게 가마보코(蒲鉾)의 원형이야. 지금 기준으로는 헤이안 시대 기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역사인 셈이지.

이름도 재미있어. '가마(蒲)'는 부들을 뜻하고, '보코(鉾)'는 창을 뜻해. 초기 가마보코가 대나무 꼬챙이에 생선 반죽을 둘러 구운 모양이 부들 창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야. 지금은 나무판 위에 반달 모양으로 올려 쪄내는 형태가 표준이 됐지만, 이름에는 옛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가마보코는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일본 전국으로 퍼졌고, 지역마다 다른 형태로 발전했어. 도쿄에선 찐 가마보코가, 오사카에선 튀긴 텐프라(天ぷら)가 발달했어. 이 다양한 일본 가마보코 문화가 19세기 말 조선에 흘러들어오면서 어묵이 탄생해.
🍢 오뎅이야, 어묵이야 — 이름 싸움의 역사
원래 '오뎅'은 생선 가공품 자체가 아니야. 무·곤약·두부·어묵 등 여러 재료를 간장 베이스 국물에 끓이는 일본 냄비 요리의 이름이야. 오뎅이라는 요리 안에 어묵이 들어가는 거지, 어묵 자체가 오뎅인 건 아니야.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 요리가 한국에 정착하면서, 재료인 생선 가공품 자체를 '오뎅'이라 부르는 문화가 생겼어. 길거리 포장마차의 꼬치 어묵을 '오뎅'이라 부르는 게 그 흔적이야. 1994년 즈음부터 '부산 어묵'이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고, 현재 식품위생법상 공식 명칭은 '어묵'이야.
정리하면 어묵은 생선살을 갈아 만든 가공식품의 공식 명칭이고, 오뎅은 일본의 탕 요리 이름이지만 한국에서는 꼬치 어묵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여. 가마보코는 일본식 찐 어묵이자 한국 어묵의 원형이고.
🇰🇷 부산어묵의 탄생 — 전쟁과 항구, 그리고 연육
한국 어묵 이야기는 부산에서 시작해야 해. 1876년 부산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가마보코 제조 기술도 함께 들어왔어. 1920~30년대 부산 부평시장 기록에 이미 '어묵'이 등장해.

그런데 어묵이 한국인의 음식으로 진짜 뿌리내린 건 한국전쟁(1950~53년) 때야. 전국에서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사람들은 항구 근처에서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생선 자투리로 먹을 것을 만들어야 했어. 생선 자투리를 갈아서 튀기거나 찐 어묵은 싸고 단백질이 풍부한 완벽한 피난 식품이었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부산어묵은 전국으로 퍼졌고, '부산어묵 = 최고'라는 인식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야.
❄️ 1960년대 홋카이도 — 냉동 수리미 혁명
이제 게맛살 이야기로 넘어가자. 1960년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서 결정적인 기술 혁신이 일어났어. 냉동 수리미(冷凍すり身) 기술이 개발된 거야.

그 전까지 수리미는 신선 생선으로만 만들 수 있어서 장거리 운반이 불가능했어. 그런데 홋카이도 수산 연구자들이 수리미에 설탕·솔비톨을 첨가하면 단백질이 냉동 상태에서도 겔화 능력을 유지한다는 걸 발견했어. 이 기술 덕분에 수리미를 대량 생산해서 전 세계로 수출할 수 있게 됐어.
그리고 여기에 완벽한 원료가 있었어. 알래스카 명태(Alaska Pollock). 북태평양에서 대량으로 잡히는 이 흰살 생선은 맛이 담백하고 겔화 능력이 탁월해서 다양한 맛을 입히기 좋아. 1965년부터 일본 가공선이 알래스카 해역에서 명태를 대규모로 잡아 수리미로 가공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전 세계 수리미의 상당 부분이 알래스카 명태로 만들어져.
🦀 크래미의 탄생 — 게를 모방한 명태의 대성공
1970년대 초 일본에서 이 냉동 수리미 기술을 활용해 전혀 새로운 식품이 탄생했어. 바로 게맛살(crab stick)이야. 여러 수산가공업체가 거의 동시에 개발해 시장을 연 것으로 알려져 있어.

게맛살의 핵심 아이디어는 이래. 수리미를 납작하게 펼쳐서 게살의 섬유질 결을 흉내 내고, 표면에 붉은 색소를 입혀 게 껍데기처럼 보이게 하고, 게 추출물·게 향료로 맛을 내는 거야. 진짜 게 한 마리도 안 들어갔는데 게맛이 나는 신기한 음식이었지. 처음엔 '가짜 음식'이라는 시선도 있었지만, 진짜 게보다 훨씬 싸고 먹기 편하다는 장점 덕분에 순식간에 세계적 히트 상품이 됐어.
한국에 게맛살이 들어온 건 1980년대야. 2000년대 초, 한성기업이 '크래미(Crami)'라는 이름으로 프리미엄 게맛살 브랜드를 출원·출시하며 한국 게맛살 시장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았어. 'Crab(게) + Ami(프랑스어로 친구)'의 합성어라는 설도 있어. 크래미는 마치 '봉고차'나 '포클레인'처럼 특정 브랜드명이 품목 전체의 이름이 된 대표적인 사례야.
지금 전 세계 수리미 시장은 2020년대 중반 기준 수십억 달러(약 40~7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되고, 연 5~6%대로 성장하고 있어. 크래미 한 봉지 안에 수십억 달러짜리 글로벌 산업이 들어있는 셈이야. 🌏
🍜 나루토마키 — 라멘 속 소용돌이의 정체
라멘 위에 올라가는 흰색 동그라미에 분홍 소용돌이가 그려진 것, 바로 나루토마키(鳴門巻き)야. 나루토마키도 수리미로 만든 가마보코의 일종이야. 흰색 반죽과 분홍색 반죽을 함께 돌돌 말아서 쪄내면 잘랐을 때 그 유명한 소용돌이 무늬가 나타나. 이 모양은 도쿠시마현의 나루토 해협(鳴門海峡)에서 생기는 거대한 소용돌이 조류에서 이름을 따온 거야.

애니메이션 《나루토》의 주인공 이름도 이 나루토마키와 이름이 연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생선 반죽 한 조각의 이름이 세계적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이름과 나란히 회자되는 거지. 🌀
🇭🇰 피시볼 — 홍콩 거리의 철학
이제 홍콩·동남아시아로 가볼게. 피시볼(Fish Ball, 魚蛋)은 수리미와 같은 원리로 만들지만 문화적 맥락이 완전히 달라. 피시볼의 원형은 중국 남부 차오저우(潮州, Teochew) 지역에서 왔어. 수백 년 전부터 이 지역 어부들이 생선 자투리를 갈아 동그랗게 만들어 끓여 먹었던 게 시작이야. 차오저우 사람들이 19~20세기에 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 등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피시볼 문화도 함께 퍼졌어.

홍콩에서 피시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홍콩의 거리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야. 전후 혼란기 길거리 노점상들이 팔던 꼬치 피시볼은 가장 싸고 배부른 음식이었고, 2016년 홍콩에서 피시볼 노점상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가 '피시볼 혁명(魚蛋革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정도야.
동남아시아에서도 수리미와 같은 원리로 만든 생선 완자류가 많고, 태국의 룩친(ลูกชิ้น), 베트남의 짜까(Chả cá)처럼 지역 이름으로 분화됐어. 각기 지역 향신료와 소스가 더해지면서 완전히 다른 음식처럼 느껴지지.
🗺️ 같은 수리미, 완전히 다른 문화

나라·지역 이름 형태 특징
| 일본 | 가마보코(蒲鉾) | 나무판 위 반달형, 찜 | 궁중 음식 → 일상 반찬 |
| 일본 | 나루토마키 | 소용돌이 원형, 찜 | 라멘 토핑 |
| 일본→세계 | 게맛살(카니카마) | 납작 스틱형 | 게 모방, 글로벌 히트 |
| 한국 | 어묵 | 납작·튀김·탕 | 전쟁 피난 음식 → 국민 간식 |
| 한국 | 크래미 | 프리미엄 스틱형 | 한성기업 브랜드, 2000년대 초 |
| 홍콩·중국 | 피시볼(魚蛋) | 동그란 공 | 거리 문화·정체성 |
| 태국 | 룩친 | 공·납작 다양 | 꼬치·국수 토핑 |
| 동남아 전반 | 어묵류 | 지역마다 다양 | 향신료와 결합 |
모두 생선 단백질을 갈아서 겔화한다는 원리는 같아. 하지만 어디서 만들었냐에 따라, 어떤 역사를 품었냐에 따라, 누가 먹었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가진 음식이 됐어.
오십보의 경제 시선으로 크래미를 보고 싶다면 → 크래미 한 봉지가 주가를 움직였다도 함께 봐.
같은 생선의 다른 발효 여정이 궁금하다면 → 쫀쿠의 케찹은 원래 생선 발효소스였다도 이어서 읽어봐.
생선이 날것에서 초밥으로 바뀐 여정이 궁금하다면 → 쫀쿠의 스시 편도 참고해봐.
🎨 마무리: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크래미 한 봉지 속에는 게가 없어. 주로 명태 같은 흰살 생선과 전분, 향료, 색소가 들어있어. 그런데 그게 '사기'냐고? 쫀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수리미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였어."
헤이안 시대의 요리사들은 생선을 낭비 없이 쓰려고 수리미를 만들었고, 부산의 피난민들은 자투리 생선으로 배를 채우려고 어묵을 만들었고, 홋카이도의 수산 연구자들은 대량 어획된 명태를 세계로 보내기 위해 냉동 수리미를 만들었어. 수리미는 결핍이 만들어낸 창의성이야.
오늘 냉장고에서 게맛살 꺼낼 때 한번 생각해봐. 그 얇은 스틱 안에 헤이안 시대 요리사, 부산 피난민, 홋카이도 수산 연구자, 알래스카 명태잡이 어부들의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는 걸.
너희는 크래미파야, 어묵탕파야, 피시볼파야? 댓글로 알려줘! 🐟
오늘도 쫀쿠는 맛있는 모험 중~ 🍪✨
태그
#크래미 #게맛살 #어묵 #오뎅 #피시볼 #수리미 #surimi #명태 #가마보코 #나루토마키 #한성기업 #부산어묵 #생선가공 #음식으로여는세상 #가공식품역사
'음식으로 여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당근은 원래 보라색이었다 — 오렌지 혁명과 비트가 지켜온 진짜 보라색 (0) | 2026.07.10 |
|---|---|
| 💜 보라색 밥상: 황제의 색깔이 당신의 식탁 위에 내려앉기까지, 안토시아닌의 3,000년 여행 (0) | 2026.07.07 |
| 🍣 스시, 발효 생선이 날생선으로 진화한 1000년: 나레즈시에서 캘리포니아롤까지 (0) | 2026.07.06 |
| 옥수수, 전 세계에서 이렇게나 달랐구나! 초당옥수수 탄생의 비밀까지 (0) | 2026.07.01 |
| 아이리시 스튜, 감자 한 알에 담긴 750년의 이야기 (0) | 2026.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