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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 시리즈 7편 — 국가가 불러들인 노동자, 스스로 건너온 상인: 런던·파리 차이나타운의 여러 뿌리

by myinfo29053 2026.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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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 시리즈 7편 — 국가가 불러들인 노동자, 스스로 건너온 상인: 런던·파리 차이나타운의 여러 뿌리

 


있잖아, 지금까지 여섯 편 다 "누군가 스스로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였잖아. 골드러시 소식을 듣고, 항구가 열리는 걸 보고, 사람들이 알아서 짐을 쌌어. 그런데 런던과 파리는 좀 달라. 여기선 국가가 먼저 사람을 불러들였어.

 

1916년,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중국과 계약을 맺었어. 서부전선 후방에서 일할 노동력이 필요했거든. 약 14만 명의 중국인이 이 계약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왔어. 대다수는 산둥성과 허베이 등 중국 북부 출신이었고, 영국 측 모집은 웨이하이웨이(당시 영국 조차지)를 거점으로 이뤄졌어.

두 도시 이야기: 국가가 부른 노동자와 스스로 건너온 상인

 

이게 오늘 이야기의 절반이야. 나머지 절반은,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스스로 경로를 찾아 건너온 사람들 얘기야.


런던의 시작 — 선원들의 동네

런던 최초의 차이나타운은 지금의 소호가 아니었어. 이스트 엔드의 **림하우스(Limehouse)**였어. 18세기 말부터 동인도회사 항로를 따라 광동·상하이 출신 선원들이 이 항구 구역에 하나둘 정착했어. 세탁업, 잡화상, 선원 하숙집 — 이게 이 동네의 실제 경제였어.

그런데 림하우스가 "위험한 동네"로 소문난 건 실제 범죄 때문만은 아니었어. 19세기 말부터 언론과 대중문학이 이 구역을 아편과 범죄, "황화(黃禍)"의 온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거든. 색스 로머의 소설 『푸만추』 시리즈가 이런 인종적 공포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한몫했어. 아편 흡연이나 도박 장소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게 중국인 공동체의 일상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부풀려진 거야. 실제로는 세탁소와 식료품점, 식당, 하숙집이 이 동네의 진짜 얼굴이었어.

림하우스의 시작 — 동인도회사 항로를 따라온 선원들

1차대전 중엔 또 다른 벽에 부딪혔어. 영국 노동조합이 압력을 넣어서, 영국이 모집한 중국인 노동단(Chinese Labour Corps)은 영국 본토 땅을 밟지 못하고 프랑스·벨기에 후방으로만 보내졌어. 자국 노동시장을 지키려는 견제였던 거야.

 

림하우스의 쇠퇴는 폭격 한 번으로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었어. 1930년대 해운업 불황과 슬럼 철거가 먼저 공동체의 기반을 흔들었고, 여기에 2차대전 블리츠 공습이 결정타를 날렸어. 전후엔 웨스트엔드의 저렴한 임대료와 외식 수요, 1950~60년대 홍콩 이민이 결합하면서 지금의 게릭 스트리트(소호) 차이나타운이 서서히 자리를 잡았어. 홍콩계 이민과 함께 광동식 레스토랑, 로스트덕, 차슈, 딤섬이 이 새 차이나타운의 외식 문화를 이루는 핵심 요소가 됐어.


14만 명,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계약을 통해 중국인 노동자를 모집했어. 영국이 약 10만 명, 프랑스가 약 4만 명 — 합쳐서 약 14만 명이라는 게 자주 인용되는 추정치인데, 집계 기준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이들은 전투병이 아니었지만 전쟁의 후방을 떠받쳤어. 도로와 철도를 고치고, 항구에서 화물을 옮기고, 군수품을 날랐어. 전쟁이 끝난 뒤엔 일부가 전장을 정리하고 불발탄을 제거하는 재건 작업에도 투입됐어.

 

법적 형식은 징병이 아니라 계약이었어. 다만 이걸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보긴 어려워. 중국 북부 농촌의 빈곤과 전란, 모집업자의 설득, 가족에게 송금할 수 있다는 기대가 이 계약을 선택하게 만든 배경이었어. '자발적'이라는 말과 '선택의 폭이 넓었다'는 말은 서로 다른 이야기야.

오해와 편견 — 림하우스와 푸만추의 그림자

임금과 조건은 영국과 프랑스 계약에 따라 달랐어. 영국 측 일반 노동자는 하루 1프랑 수준이었다는 자료가 있고, 프랑스 측 계약은 더 높은 임금을 제시했다고 알려져 있어.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약 2,000명으로 집계되는데, 이 안에는 전투 중 사망뿐 아니라 전후 복구 작업 중 사고와 질병도 포함돼. 더 큰 추정치를 제시하는 자료도 있지만, 확정된 국제 통계로 보긴 어려워.

 

노엘르쉬르메르의 중국인 묘지에는 약 840기의 비석이 서 있어(자료마다 838~842기로 조금씩 다르게 집계돼). 각 비석엔 네 가지 성어 중 하나가 새겨져 있어.

至死忠誠 —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을 다하다 流芳百世 — 아름다운 이름이 영원히 전해지다 勇往直前 —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다 雖死猶生 —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있다

 

이 묘비들은 단순한 추모물이 아니야. 영국 제국의 전쟁 기억 체계 안에서 중국인 노동자를 어떤 언어로 기록할 것인지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해. 영어와 중국어가 나란히 새겨졌지만, 이들은 오랫동안 유럽의 공식 전쟁 서사에서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어. 2002년이 돼서야 이곳에서 공식 추모 의례가 다시 열렸어 — "처음"이라기보다 오랜 침묵 끝의 "재개"였다고 보는 게 정확해. 같은 해, CLC의 마지막 생존자로 알려진 주구이셩(朱桂生)이 프랑스 라로셸에서 105~106세로 세상을 떠났어.

[1차 대전] 14만 명, 서부전선의 후방을 떠받치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전쟁이 끝난 뒤 1918~1922년 사이 중국으로 돌아갔어. 다만 수천 명은 프랑스에 남았어. 이 잔류자 규모는 자료마다 2,000명에서 7,000명까지 폭이 커. 그중에서도 저장성 청톈(靑田) 출신 잔류자들의 존재감이 컸어. 이들이 파리 중국계 사회의 유일한 출발점은 아니었지만, 초기 정착의 중요한 한 층위였던 건 분명해.


파리 — 하나가 아니라 여러 겹의 지층

파리 이야기를 하나의 "차이나타운"으로 정리하긴 어려워. 여러 이주 물결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 쌓인 지층에 가깝거든.

[파리] 여러 겹의 이주 지층 — 1876년 원저우 상인의 행상 네트워크

가장 먼저, 1876년 원저우(溫州) 항이 개항하면서 절강성 원저우·청톈 출신 행상들이 파리로 흘러들기 시작했어. 전후 프랑스에 남은 노동자 일부는 처음엔 리옹역 근처 일로 샬롱(Îlot Chalon)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 이후 원저우·청톈 출신 상인 네트워크와 만나면서 마레(Marais) 지구의 가죽·직물 도소매 경제로 이어졌어.

 

**13구 트리앙글 드 쇼지(Triangle de Choisy)**는 완전히 다른 결이야. 1970년대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에서 난민들이 밀려들었고, 그중엔 그 지역에 뿌리내렸던 화교 공동체도 많았어. 지금 파리에서 가장 널리 "차이나타운"으로 알려진 곳이 여기인데, 사실 이 안엔 중국 본토 출신뿐 아니라 인도차이나 화교와 여러 세대의 동남아 이주민이 함께 들어 있어. 어느 한 출신 집단이 더 많다고 단정하긴 어려워 —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 자체가 행정적 분류라기보다, 도시가 여러 이주 역사를 하나로 묶어 부르는 이름에 가까운 거지.

 

**벨빌(Belleville)**은 1980년대 이후, 특히 원저우·복건성 출신을 비롯한 본토 중국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생활권이야. 식당과 도소매, 이주 서비스가 밀집한 다문화 공간이 됐어.

 

구역 주요 형성 배경 성격

마레 1876년 원저우 개항 이후 행상 네트워크 + 전후 CLC 잔류자 가죽·직물 도소매
13구 1970년대 인도차이나 난민(화교 포함) 대형 상업·식당 공간
벨빌 1980년대 이후 본토 중국(원저우·복건) 이민 식당·도소매·이주 서비스

원저우,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건너온 사람들

원저우는 험한 산악 지형에 농지가 부족해서 일찍부터 "밖으로 나가 벌어오는" 문화가 자리 잡은 지역이야. 중국 개혁개방 이후 민간기업과 가족 경영 네트워크가 빠르게 성장한 대표적인 상업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어.

차이나타운의 지형도 — 13구 쇼지와 원저우의 벨빌

원저우 이민자들은 친족·동향 네트워크를 통해 이동했어. 한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같은 마을 사람을 불러들이고, 그 사람이 또 다음 사람을 부르는 방식이야. 원저우 당국 자료는 전 세계 131개국에 약 68만~70만 명의 원저우계 화교·화인이 분포한다고 추정하는데, 이건 국적·출생지·혈통을 어떻게 포함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수치라는 걸 감안해야 해. 2015년엔 원저우 출신 기업가 쉐성왕이 파리 교외에 '유럽 최대'로 소개된 섬유 거래센터를 열었어. 작은 노점에서 시작한 네트워크가 도매·무역 인프라로까지 확장된 사례야.

국가가 계약서를 들고 데려온 산둥성 노동자들과,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스스로 경로를 개척한 원저우 상인들 — 이 둘이 오늘날 파리 화교 사회의 서로 다른 두 문법이야.


마레의 국수 한 그릇에 담긴 것

마레 지구의 오래된 중국 식당에서 파는 완탕면 이야기로 마무리할게. 이걸 "저장성 스타일이 광동식을 대체했다"고 딱 잘라 말하긴 어려워. 광동·홍콩식 면 요리도 여전히 있고, 원저우·청톈 출신 이주민이 늘면서 저장성 남부의 해산물·완탕·면 음식도 함께 소개됐거든. 그러니까 마레의 국수 한 그릇은 어느 한 지역 음식이 순수하게 보존된 결과라기보다, 광동·저장성·동남아 음식문화가 파리라는 도시에서 뒤섞인 결과에 더 가까워.

마레의 국수 한 그릇 — 광동과 저장성의 맛있는 만남

이민 음식은 고향을 기억하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현지 고객에게 팔기 위해 계속 조정되는 상품이기도 해. 메뉴가 바뀌는 게 정체성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야 —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지 고르는 것 자체가 상업적 판단이었던 거지.


마무리 — 차이나타운은 하나의 기원이 아니다

차이나타운은 겹겹이 쌓인 지층이다 — 쫀쿠의 최종 평점

런던에서는 선원과 세탁 노동자가 항구를 만들었고, 홍콩계 이민자가 그걸 웨스트엔드로 옮겨 심었어. 파리에서는 전쟁 노동자, 원저우 상인, 인도차이나 난민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 도시의 여러 지점을 이어 붙였어. 차이나타운은 하나의 씨앗에서 자란 게 아니라, 노동과 전쟁과 법과 상업이 겹겹이 쌓인 지층이야.

 

너희는 런던이나 파리 여행 중에 차이나타운 가본 적 있어? 어떤 음식 먹었는지 궁금해! 🥟✨

오늘도 쫀쿠는 맛있는 모험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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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예고 — 차이나타운 시리즈 8편, 밴쿠버·토론토로 갑니다. 1997년 홍콩 반환이 만든 완전히 다른 결의 이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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